오늘 한 장의 저자 김기석 목사는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 아집이 된다고 경고하며, 그 해결책으로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 사상가인 시몬느 베이유의 '머뭇거림'을 소개합니다. 흔히 우리가 바라는 덕목의 목록에는 좀처럼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이 태도가, 사실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돌아보면 20대의 저는 동기가 순수하고 옳으니 결과도 옳으리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말도 있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분대장 완장을 차고 밀어붙인 개혁도 결국 저자가 말한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하려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의 마음과 속도를 헤아리지 않고 위에서 내려준 자유는, 후임들에게 자유라기보다 혼란이었을 테니까요. 상대에 대한 이해 없이 제 확신만으로 설계한 '천국'은 결국 허상이었습니다.
이는 믿음을 가진 우리가 특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합니다. 저자도 종교인들의 언어가 유독 단정적이라고 꼬집지요. 우리는 종종 강한 확신이 곧 강한 믿음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 있는 이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예요",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요" 같은 말을 너무 쉽게 건네곤 합니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확신의 언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닫힌 문이 되기도 하지요. 위로한답시고 저 역시 그런 말을 쉽게 건넨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돌아보니 너무 많군요😭).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내 판단에 대한 확신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말이죠.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1~2).
그렇다면 머뭇거림은 일상에서 어떤 모습일까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단톡방에 누군가를 향한 판단의 말을 보태기 전에 잠깐 손을 멈추는 것,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에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어 보는 것,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결론부터 내리고 싶을 때 한 박자 참고 끝까지 들어 보는 것. 그 짧은 멈춤 속에 저자가 말한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때 내무반의 제게 필요했던 것도 옳다는 확신이 아니라, 그 옳음을 어떻게 이뤄 갈지 한 번 더 숙고하는 한 박자의 머뭇거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독자님, 요즘 어떤 확신을 붙들고 계신가요? 혹시 그 확신이 누군가를 향한 단정의 언어가 되어 있지는 않나요? 이번 한 주는 말하기 전에, 판단하기 전에 한 번쯤 머뭇거려 보면 어떨까요? 그 짧은 머뭇거림이 상대를 숨 쉬게 하는 작은 여유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단단하게, 이웃을 향한 말은 조금 더 천천히.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한 장에서 다시 만나요. 안녕!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