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런 말이 유행했었지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hat Would Jesus Do?) 이 말 안에는 예수님처럼 선택하고 행동하고 싶다는 선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지혜로운 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 하는 궁금함도 숨어 있습니다. 저 역시 늘 이런 게 궁금했습니다. ‘C.S. 루이스쯤 되는 당대 최고의 변증가는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 답일까?’
루이스는 우아하고 세련된 언어로 기독교와 우주, 기적과 고통에 대해 명쾌하게 논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는 처절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그가 한평생 옹호하고 변증해 온 하나님께 울부짖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침묵’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우리는 빠르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 신이란 존재는 허상이구나, 거짓이구나.’ 혹은 ‘하나님이 침묵하시지만,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믿음의 말로 퉁치며 하나님의 뜻을 속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진실한 속내를 드러낼 뿐입니다.
‘좋을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더니,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인색하셔.’
AI 시대를 사는 우리는 빠른 답에 익숙합니다. 언젠가 챗GPT에 질문을 적다가 실수로 중간에 엔터를 누른 적이 있습니다. 질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AI는 이미 그럴싸한 답을 내놓더군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원했던 답이 아니었습니다. 제 질문의 의도를 넘겨짚은, 의미 없는 말들의 나열일 뿐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빠른 대답이 늘 좋은 대답은 아니구나. 때로는 늦더라도, 정직한 침묵이 필요한 순간이 있구나. 그러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문제와 고통 앞에서는 조금 천천히 말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AI가 아니니까요.
나와 타인의 고통에 성급하게 결론짓거나 해석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손쉽게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도 말고요. 최고의 기독교 지성이라 불렸던 루이스조차 고통 앞에서 솔직했고,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 앞에서 눈물 흘리며 아파하셨으니까요. 우리, 너무 아는 척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센 척하지도 맙시다. 특히 평온한 상태에 있는 내가, 깊은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더더욱요.
구독자님, 지금 어떤 인생의 계절을 지나고 계신가요?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인가요? 아니면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보내고 계신가요? 어떤 상황이든, 우리 함께 힘을 냅시다. 다만 억지로 ‘여기에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이 고난이 끝나면 꽤 괜찮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라고 무리해서 포장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터놓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너무 아프다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침묵 앞에 우리가 있는 그대로 머물 때, 비로소 고통 중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조금 더 깊이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한 장에서 다시 만나요. 안녕! 👋 |